[아름다운사회]검정 고무신

[한희철 목사]

시골을 찾았다가 댓돌 위에 가만히 놓인 검정 고무신을 보는 순간, 오래전에 쓴 ‘검정 고무신’이라는 동화가 생각났습니다. 동네 이웃집에 일을 다닌 할머니가 품값 삼아 받아온 강아지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털이 누렇다고 누렁이란 이름을 얻은 강아지입니다.

이른 새벽 할머니가 일을 나가면 하루 종일 혼자 빈집을 지켜야 했던 누렁이는 그게 심심했던지 온 집안을 뒤져대기 시작했습니다. 구석구석 발 가는 대로 집 안팎을 헤집던 강아지가 마침내는 마루 밑에까지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겁도 없이 어두컴컴한 마루 밑을 기어 다니다 한 쪽 구석에 버려져 있는 검정 고무신 한 짝을 보았던 것입니다. 누렁이는 작은 입으로 고무신을 물고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총총 별을 이고 어둠 속 돌아온 할머니가 매운 연기를 날리며 저녁밥을 짓다가 돌계단 밑에 떨어져 있는 고무신을 보았습니다. 할머니는 흠칫 놀랐습니다. 내가 뭘 잘못 보았나 싶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할머니가 고무신을 집어 들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고무신의 주인입니다. 할머니가 장에 다녀오던 날 고무신은 마루 밑으로 버려졌습니다. 궁상맞다는 할머니의 타박에도 할아버지는 고집스레 검정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운동화를 사 온 할머니는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말라는 투로 고무신을 마루 밑창으로 내던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 나가려던 할아버지가 고무신을 찾았을 때 할머니는 대답 대신 새로 사온 운동화를 내어놓았던 것이었습니다. 

고무신을 다시 발견한 할머니는 우물가로 가서 고무신을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마른 수건으로 정성껏 물기를 닦은 할머니는 고무신을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더니 낡은 재봉틀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영감!” 하며 할아버지를 불렀습니다. 할머니의 젖은 눈길 위로는 할아버지의 수염 난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사진을 보는 순간 고무신은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매일 밤 마루 밑에서 들었던 할머니 이야기는 할아버지 사진을 보며 할머니가 혼자서 한 얘기였습니다. 할머니는 밤마다 옆에 누가 있는 듯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곤 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며 때로는 웃었지만 많이는 울먹였습니다. 불 꺼진 방에서 흘러나오는 할머니의 울음소리를 고무신은 마루 밑에서 자주 듣곤 했습니다. 

고무신을 방안으로 들인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무신을 감춰 미안했다는 말을 한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재봉틀 위에 있는 고무신을 안고 다시 자리에 누웠습니다. 할머니는 주섬주섬 당신 가슴을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고무신을 가슴에 고이 안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의 따뜻한 가슴에 안긴 고무신은 자기에게 남아 있는 할아버지의 체온이며, 할아버지랑 함께 한 시간들을 할머니 가슴에 전해 드리고 싶어 애를 썼고요. 

검정 고무신은 더 이상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검정 고무신 속에는 우리 부모님 세대의 고단한 시간이 담겨 있습니다. 함부로 무시할 철지난 물건이 아니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