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민 종교칼럼] 미지근한 물

요즘 날씨기기 몹시 덥습니다. 시원한 물을 자주 찾게 됩니다. 시원한 물이 주는 그 상쾌함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시원한 물 이야기는 문득 신병 훈련시절이 떠오릅니다.

1960 4월부터, 대학생을 주축으로 부정선거 반대시위가 촉발된 것이 4.19혁명입니다. 그런데 나는 4.19 바로 직전, 대학 2학년 때 이미 군 징집영장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4.19사태로 징집이 다소 연기 되었다가 그 해 6 23일 드디어 나는 논산 훈련소에 입소되었습니다. 신체검사 실시 등 입소절차가 끝나고 7월과 8월 한 여름 복중에 신병훈련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 같은 훈련기간 동안 겪어야 했을 그 고충들은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훈련장 출동 전, 물을 채운 수통을 허리에 차고 나가 한참 훈련을 치루다 보면 목이 타게 됩니다. 그러나 수통의 물은 이미 뜨거운 햇빛으로 인해 뜨듯한 물로 변했습니다. 그래도 타들어가는 목을 추겨야 하는 훈련병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뜨듯 미지근한 수통 물조차 다 떨어집니다. 잠시 휴식시간이 돌아오면 논바닥 물을 손으로 움켜 마셨습니다. 논바닥 물은 더 미지근했지만 땀으로 범벅이 된 신체는 물이 필요했습니다. 이 같은 미지근한 물의 추억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그 같은 미지근한 물을 맛보셔야만 하셨습니다. 특히 그의 교회로부터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우리 주님께 그 같은 '미지근한 물'을 드리는 교회였습니다( 3:16).

사도 바울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직접 방문한 적은 없습니다. 아마도 바울의 동역자 에바브라에 의해 선교가 시작된 교회인 듯합니다( 4:12-13). 그러나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낸 자신의 서신을 통해 라오디게아 교회를 문안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4:13-16). 그리고 자신의 서신을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과 함께 읽을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과의 직접적인 교제가 있었음을 성경은 암시해 줍니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에 있어서 그의 서신사역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서신들은 신약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초대교회 시대에 세워진 교회들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본래 교회 사명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성령께서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통하여 이들 교회들을 다시 일깨우시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아시아 7곱 교회들에 보낸 메세이지를 통해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한편 무서운 책망도 하십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의 칭찬을 들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오히려 그의 책망은 준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하여 현대교회의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도 큽니다.

첫째로 이 교회를 향한 책망은 그들의 미지근한 믿음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분명한 그 정체성을 요구하십니다. 만일 이를 돌이키지 아니하면 주님은 "내 입에서 너희를 토하여 내치리라" 강력히 경고하십니다. 이 같은 '미지근 물'(Lukewarm)은 그 정체성에 있어서 모호함을 말씀합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다운 크리스천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낮에는 기는 짐승들 편에 서고 밤이면 날아다니는 짐승 편에 서는 박쥐 형 크리스천이 대부분입니다. 크리스천 생활과 세상 사람들의 삶과 경계가 없습니다. 교회당 안에서는 선남선녀들이고 교회 밖에서는 세상 불신자들과 구분이 없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해도 그들 실제 삶은 주님과는 너무나 먼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본적도 없고, 영적으로 거듭난 적도 없고 생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네가 믿음에 있는가 네 자신을 시험하라" 명하시고 있습니다(고후 13;5).

둘째로 영적 가난뱅이들의 신앙상태입니다. 자신들은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스스로 자부합니다. 이 또한 현대교회 상과 너무도 닮았습니다. 현대교회는 내로라 자랑하는 교회들로 넘쳐납니다. 저들마다 세계최대 교회를 짓고자 혈안입니다. 교회재정은 천문학적입니다. 똑똑한 목회자들을 고르고 골라 청빙합니다. 교회제직들은 내 노라 하는 세상직위와 재물과 학식들을 겸비한 인물들로 넘쳐납니다. 높은 교육수준급의 인텔리들로 교회는 채워져 있습니다. 현대교회는 모두가 "나는 부요하다.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자부합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현대교회만큼 부한 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모두 낙제실격감입니다. 우리 주님의 눈에 그들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일 뿐입니다(3:17-18).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의 새 옷, 구원의 새 옷이 필요합니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혼의 거듭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셋째로 주님의 사랑의 초청입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이제 마음 문을 열고 네 안에 나를 영접하라"( 3:20) 청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니고데모 같은 종교지도자에게도 필요했고, 여러 남자들을 찾고자 방황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필요했습니다. 그 같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당신에게도 필요합니다. 만일 이제까지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고 살아온 신앙이라면 회개하고 구주를 오늘 영접해야만 합니다. 주께서는 오늘도 이처럼 당신을 청하시고 계십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올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원하는 자는 와서 값없이 생수를 마시라."(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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