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꽃등과 꼴등

[한희철 목사]

봄이 되면 사방이 꽃들로 가득합니다. 차갑고 매서운 겨울을 용케 견디고, 견딘 만큼 향기가 되어 피어납니다. 온갖 색들의 향연, 대체 색깔의 근원은 어디인지 해마다 자신의 빛깔을 잊지 않습니다. 다른 꽃들과 구별되는 고유함은 어떻게 지켜가는 것인지, 필시 꽃들에겐 어려울 것 하나 없을 그 일이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신비일 뿐입니다.

봄이 돌아오면 마당과 골목이 모처럼 환해집니다. 대청소를 끝낸 것처럼, 누군가를 환영하기 위해 등을 내단 것처럼 표정이 달라집니다. 길게 늘어진 노란 영춘화가 지나가는 이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흰색과 자색의 목련은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감탄사를 터지게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터져 나오는 감탄사는 마치 딱딱하게 굳은 땅에 샘이 솟는 것 같습니다. 붉은 진달래는 시간 여행을 하게 합니다. 배고픈 시절 꽃을 따 먹던, 전 한가운데 한 송이 예쁜 꽃을 올렸던 화전을 떠올리게 합니다.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은 또 있습니다. 골목길을 지나가다 보면 어디선가 날카롭게 코를 찌르는 향기가 있습니다. 놓치기 쉬운 향기입니다. 그 향기는 마치 심심했던 아이가 술래잡기를 청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숨을 테니 나를 찾아볼래요,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조심스레 다가가면 자기를 찾아주어 고맙다는 듯 라일락이 해맑게 웃습니다.
소란스러움 없이 이 산 저 산 피어난 산벚꽃은 산이 아니라 산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수놓습니다. 엄격하신 교장 선생님처럼 멋과는 거리가 멀다 싶은 산이 모처럼 화사한 옷으로 갈아입는 시간입니다. 누구에게라도 다른 이들에게 쉬 드러내지 않는 뜨거운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니까요. 산벚꽃이 핀 산을 담기에는 파스텔이 가장 어울리겠다 싶어, 마음속에 쟁여둔 그리움의 색깔들을 찾게 됩니다.
며칠 전 시골을 찾았더니 목단과 작약의 꽃망울이 터질 듯했습니다. 누구를 향한 그리움이기에 저리 단단하고 견고할까 싶을 정도였지요. 그중 목단에게 마음이 갔던 것은 지난해 몇 송이밖엔 꽃을 피우지 못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얼마든지 그럴 때도 있지요 하듯, 붉은빛을 머금은 꽃송이가 여러 개였습니다. 꽃송이를 세면 꽃이 떨어진다는, 언젠가 우연히 들었던 말이 떠올라 빙긋 바라보기만 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방에서 피어나는 봄꽃들을 두고 ‘앞다투어 핀다’고 말합니다. 말속에는 언제라도 마음이 담기는 법, ‘앞다투어 핀다’는 말속에도 고단한 우리의 일상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 돌아보게 됩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공부도, 운동회날 달리기도, 글짓기도, 그림도, 웅변도, 태권도도, 그러다가 어른이 되어 회사에 들어가면 승진도, 늘 앞을 다투며 살아온 시간이 담겨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어디 꽃들이 앞을 다툴까요? 저마다 자신의 때를 따를 뿐이지요. 봄꽃들은 앞을 다투어 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손을 잡고 피어납니다. 우리말에 ‘꼴등’은 맨 끝이지만, ‘꽃등’은 맨 처음을 의미합니다. 꽃들이 그렇듯이 이왕이면 서로가 서로를 꽃등이라 불렀으면 좋겠습니다.